반도체 전쟁의 룰이 바뀌고 있다
오랫동안 반도체 경쟁의 승패는 하나의 숫자로 결정됐습니다.
3나노, 2나노.
회로 선폭이 얼마나 얇은가. 얼마나 작게 만들 수 있는가.
솔직히 저도 한동안 이 숫자가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뉴스에서도 그렇게 다뤘고, TSMC가 3나노 양산에 성공했다는 소식은 그 자체로 국가 경쟁력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졌으니까요.
그런데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 게임의 룰이 조용히 바뀌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더 작게 만드는 게 왜 한계에 부딪혔나
반도체 회로를 더 작게 만드는 게 왜 좋냐면, 같은 면적에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집어넣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트랜지스터가 많을수록 연산 능력이 올라가고, 전력 효율도 좋아집니다.
그래서 수십 년간 반도체 기업들은 앞다퉈 공정을 미세화해왔습니다.
문제는 미세화할수록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는 겁니다.
첨단 반도체를 만들려면 EUV 노광 장비가 필요한데, 이 장비 하나 가격이 약 4천억 원에 달합니다. 처음 이 숫자를 봤을 때 잘못 읽은 줄 알았습니다. 장비 하나가요. 공장 하나를 짓는 데는 수십조 원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비용만 문제가 아닙니다. 공정이 미세해질수록 수율, 즉 정상적으로 만들어지는 제품의 비율이 낮아집니다. 100개를 만들면 60개만 쓸 수 있고, 나머지 40개는 버려야 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그 40개가 공짜가 아니라는 게 문제입니다. 다 똑같이 비싸게 만든 것들입니다.
기술 난이도도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원자 몇 개 수준의 크기에 가까워지면서 “더 작게”를 외쳐도 현실이 따라와 주지 않는 구간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결국 지금까지의 방식, 즉 더 작게 만들면 무조건 성능이 좋아진다는 공식이 점점 비용 대비 효율이 떨어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마감이 경쟁력이 되는 시대
반도체 제조 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뉩니다.
전공정은 웨이퍼 위에 아주 미세한 회로를 새기는 작업입니다. 말하자면 설계도를 실리콘 위에 그려넣는 단계입니다.
후공정은 그렇게 만들어진 칩을 잘라내고, 연결하고, 포장하는 작업입니다. 오랫동안 반도체 산업에서 후공정은 다소 단순한 마무리 작업 정도로 여겨졌습니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핵심 기술은 앞에 있고, 후공정은 그냥 포장이겠거니 하고요.
그런데 지금은 이 인식이 빠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AI 시대에 들어서면서 반도체에 요구되는 것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AI 연산에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데, 단순히 칩 하나를 더 미세하게 만드는 것보다 여러 칩을 하나처럼 연결해서 함께 작동하게 만드는 방식이 더 효율적인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이게 바로 첨단 패키징 기술입니다. 후공정의 핵심이 된 영역입니다.
엔비디아가 TSMC에 맡기는 게 칩 제조만이 아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엔비디아의 AI 가속기 H100, 그리고 차세대 블랙웰 칩. 이 제품들의 경쟁력은 단순히 회로가 미세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HBM이라는 고대역폭 메모리와 GPU 칩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 붙여서 데이터를 초고속으로 주고받을 수 있게 만든 구조, 그리고 여러 칩을 하나의 패키지 안에 통합하는 기술이 실제 성능을 결정합니다.
이 기술을 CoWoS라고 부르는데, TSMC의 첨단 패키징 기술입니다.
엔비디아가 AI 칩을 만들면서 TSMC에 의존하는 이유 중 하나가 단순한 칩 제조 능력이 아니라 이 패키징 기술이기도 합니다.
SK하이닉스가 HBM 시장에서 주목받는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HBM은 단순한 메모리 칩이 아니라, 여러 개의 메모리 칩을 수직으로 쌓아 올려 연결한 구조입니다. 이 쌓고 연결하는 기술 자체가 후공정의 핵심입니다.
“더 작게”가 아니라 “더 잘 연결하는 것”이 지금 반도체 성능을 결정하는 핵심 변수가 되고 있는 겁니다.
미국이 후공정에 눈을 돌린 이유
여기에 지정학 변수가 더해집니다.
미국은 반도체 공급망에서 자국 의존도를 높이려는 방향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반도체지원법(칩스법)을 통해 TSMC, 삼성, 인텔의 미국 내 공장 건설을 지원하고 있고, 중국에 대한 첨단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도 계속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현실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전공정, 즉 첨단 칩을 만드는 기술은 TSMC와 삼성 등 극소수 기업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미국이 아무리 공장을 지으려 해도 그 기술력을 단기간에 따라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면 후공정은 다릅니다. 전공정보다 진입 장벽이 상대적으로 낮고, 생산 거점을 분산하기도 훨씬 수월합니다.
그래서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 일본, 인도까지 자국 내 후공정 역량을 키우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공급망 안정성을 확보하는 현실적인 대안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입장에서도 이 흐름은 중요합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전공정에서도 강하지만, 첨단 패키징 기술에서도 경쟁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 역량이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어떻게 활용되느냐가 앞으로 한국 반도체 산업의 방향을 결정하는 변수 중 하나가 될 겁니다.
그렇다고 전공정이 끝난 건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면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후공정이 떠오른다고 해서 전공정이 끝났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흐름을 처음 접하면 “그럼 나노 경쟁은 이제 의미 없는 건가?” 싶기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2나노, 1.4나노를 향한 경쟁은 여전히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TSMC는 2나노 이하 공정 개발에 막대한 투자를 쏟아붓고 있고, 삼성전자도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구조를 적용한 3나노 공정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전공정의 미세화는 여전히 반도체 성능의 천장을 높이는 핵심 기술입니다.
달라진 건 전공정만 잘하면 됐던 시대에서 전공정과 후공정을 함께 잘해야 하는 시대로 넘어왔다는 겁니다.
이전엔 칩을 얼마나 작게 만드느냐가 핵심이었다면, 이제는 그 칩들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연결하고 통합하느냐가 함께 중요해졌습니다. 경기가 하나만 있던 데서 두 가지 경기를 동시에 잘해야 하는 구조로 바뀐 겁니다.
패권의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속도
이 변화가 얼마나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지는 시장 규모로 확인됩니다.
첨단 패키징 시장은 앞으로 몇 년간 연평균 10%대 이상의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전망됩니다. AI 반도체 수요가 계속 늘어날수록 이 시장도 함께 커지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이 시장에서 지금 가장 앞서 있는 건 TSMC입니다. CoWoS, SoIC 같은 첨단 패키징 기술에서 TSMC의 기술력은 경쟁사들이 따라오기 쉽지 않은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도 이 시장을 의식해 패키징 기술 투자를 강화하고 있고, 인텔은 파운드리 사업 재건의 핵심 카드 중 하나로 패키징 기술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후공정이 더 이상 마무리 작업이 아니라 반도체 패권 경쟁의 새로운 전선이 됐다는 신호들입니다.
결국 질문이 바뀌었다
반도체 패권을 판단하는 질문이 바뀌고 있습니다.
예전엔 이랬습니다. “몇 나노 공정까지 할 수 있나?”
지금은 여기에 질문이 하나 더 붙었습니다. “여러 칩을 얼마나 잘 연결하고 통합할 수 있나?”
이 두 번째 질문이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다는 게 지금 이 산업에서 제가 가장 흥미롭게 보는 부분입니다.
AI가 요구하는 연산이 커질수록, 데이터 처리 속도가 중요해질수록, 칩을 잘 만드는 것만큼 칩들을 잘 엮는 기술이 실질적인 성능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반도체 전쟁의 새로운 전선. 지금 그 무게중심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