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만들던 회사가 데이터센터를 짓는 이유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좀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를 만들던 회사들이 갑자기 서버 이야기를 한다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조선과 데이터센터는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세계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들여다보니, 그 연결이 생각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곳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걸 이해하려면 먼저 조선이라는 산업이 지금 어떤 자리에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조선은 원래 어떤 산업이었나

조선업은 오랫동안 ‘노동집약적 제조업’의 상징이었습니다. 거대한 선박을 수작업과 기술로 조립하는 산업이었고, 한국은 그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춰왔습니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선박 발주가 줄고, 중국 조선사들이 가격 경쟁에서 치고 올라오면서 한국 조선업계는 긴 침체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구조조정이 반복됐고, 한때 조선소가 밀집했던 지역 경제 전체가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다시 회복세입니다. LNG 운반선, 친환경 선박 등 고부가가치 선박 중심으로 수주가 늘면서 이른바 ‘슈퍼사이클’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업계는 알고 있습니다. 이 사이클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다음 먹거리를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배를 만든다는 것의 본질

여기서 한 가지 관점을 바꿔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소가 하는 일을 ‘배를 만드는 것’으로만 보면 데이터센터와의 연결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극한 환경에서 작동하는 대형 구조물을 설계하고, 전력·냉각·설비를 통합해서 짓는 것’이라고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선박은 본질적으로 움직이는 소형 도시입니다. 자체 발전 시스템을 갖추고, 전력을 안정적으로 분배하고, 좁은 공간에 복잡한 설비를 밀어넣어 수개월씩 바다 위에서 운용됩니다. 이 경험의 축적이 지금 전혀 다른 곳에서 의미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데이터센터가 막힌 곳, 조선이 열리는 곳

AI 확산과 함께 데이터센터 수요는 빠르게 커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수요를 받아낼 공간이 생각보다 빨리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육상 데이터센터는 크게 세 가지 벽에 막힙니다. 부지를 구하는 것, 전력을 끌어오는 것, 그리고 서버에서 나오는 열을 식히는 것. 특히 미국에서는 데이터센터 입지를 두고 지역 주민들의 반발도 거세지고 있고, 신규 변전소 하나를 짓는 데 5년 이상이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엔비디아의 차세대 GPU가 요구하는 전력은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2028년에 도입될 예정인 카이버(Kyber) 아키텍처는 랙당 최대 1MW의 전력이 필요할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 수준이 되면 1,000개의 랙을 갖춘 데이터센터 하나를 운영하려면 1GW급 전력이 필요한 계산이 나옵니다.

이 전력을 육상 전력망에만 의존해서 공급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온 발상이 하나 있습니다. 바다로 가면 어떨까.


삼성중공업이 워싱턴 D.C.에 나타난 이유

최근, 미국 워싱턴 D.C.에서 ‘데이터센터월드(DCW) 2026’이 열렸습니다. 북미 데이터센터 업계의 주요 전시회입니다. 그런데 이 행사에 처음으로 참가한 기업이 하나 있었습니다. 삼성중공업입니다.

삼성중공업은 이 행사에서 자체 개발한 ‘부유식 데이터센터(FDC, Floating Data Center)’를 선보였습니다. 바다나 강 위에 설치하는 데이터센터입니다. 육상에서 막히는 세 가지 문제, 부지 확보, 전력 수급, 냉각 효율을 해상 구조물 기술로 풀겠다는 구상입니다.

발표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미국 선급 ABS와 영국 선급 로이드(LR)로부터 50MW급 FDC에 대한 개념설계 인증(AiP)을 획득했고, 전기·자동화 기업 ABB와는 전력 시스템 공동 개발에 착수했으며, 미국 데이터센터 개발사 무스테리안과는 현지 사업을 위한 업무협약(MOU)도 체결했습니다.

삼성중공업이 데이터센터 행사에 나타난 건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생태계를 짜기 시작한 것입니다.


HD현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들어갔다

비슷한 시기, HD현대중공업은 다른 방식으로 같은 시장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HD현대중공업은 미국 에너지 인프라 개발기업 아페리온 에너지 그룹(AEG)과 자사의 힘센엔진(HiMSEN) 기반 발전설비 공급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총 684MW, 6,271억 원 규모로 HD현대중공업 엔진 계약 가운데 역대 최대 수준이며, 미국 데이터센터 시장 첫 진출이라는 상징성도 큽니다.

접근법은 다릅니다. 삼성중공업이 ‘데이터센터를 바다 위에 짓겠다’는 구조물 자체에 도전했다면, HD현대중공업은 ‘데이터센터가 필요한 전력을 우리가 공급하겠다’는 쪽으로 파고들었습니다. 방향은 달라도 목적지는 같습니다. 육상 전력망이 감당하지 못하는 곳을 조선 기술로 메우겠다는 것입니다.

AI 데이터센터는 24시간 무중단 운전이 필수인 만큼 전력의 품질이 사업의 핵심입니다. 송전망 증설이 느린 지역에서는 데이터센터가 전력망 중심에서 벗어나 자가발전이나 분산전원 쪽으로 이동하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조선업이 보유한 엔진과 발전 기술이 데이터센터 인프라로 이어질 여지가 커졌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왜 조선인가, 다시 한번

이쯤에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왜 하필 조선업인가. 발전 기술이라면 다른 회사들도 갖고 있고, 해상 구조물도 조선만의 영역은 아닙니다.

그런데 조선이 가진 것 중에 잘 보이지 않는 강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모듈화 건조 경험입니다.

조선소의 표준화된 건조 프로세스를 활용하면 기존 육상 데이터센터보다 납기를 단축할 수 있고, 자체 발전 시스템을 탑재해 육상 전력망 의존도를 낮출 수 있습니다.

육상 데이터센터는 땅을 사고, 허가를 받고, 건물을 짓고, 전력을 끌어오는 순서로 진행됩니다. 각 단계가 순차적이고, 중간에 하나라도 막히면 전체가 멈춥니다. 반면 조선소에서 짓는 구조물은 설계·제작·설비 통합을 동시에 진행합니다. 완성되면 현장으로 이동해서 연결합니다. 이 방식이 데이터센터 납기 단축이라는 측면에서 실제 경쟁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흐름이 어디로 향하는가

지금 시점에서 보면 조선의 데이터센터 진출은 아직 초기입니다. 개념설계 인증이 나왔고, MOU가 체결됐고, 발전 설비 수주가 시작됐습니다. 실제 부유식 데이터센터가 바다 위에 떠서 운용되는 모습은 아직 몇 년 더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방향은 선명하게 보입니다.

데이터센터라는 산업이 요구하는 것들, 안정적인 전력, 냉각 효율, 빠른 구축 속도, 부지 제약 회피, 이 네 가지가 조선업이 수십 년간 쌓아온 역량과 정확하게 겹칩니다. 이게 우연이 아니라는 게 지금 이 흐름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 변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어쩌면 기술 자체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한 산업이 다른 산업의 문제를 풀어주는 방식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그 연결이 생각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곳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철강이 먼저 보여줬고, 지금은 조선이 그 길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다음은 어떤 산업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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