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으로 화물을 보내는 가장 빠른 길. 인류는 오래전부터 그 길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길이 조금씩 열리고 있습니다.
500년 된 꿈, 북극항로
북극항로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은 152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러시아 외교관 드미트리 게라시모프가 북극해를 통해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 제안했습니다. 당시로선 황당한 이야기처럼 들렸겠지만, 그 이후 수백 년 동안 수많은 탐험가들이 이 항로를 찾아 목숨을 걸었습니다.
비투스 베링, 헨리 허드슨, 존 프랭클린. 지금도 북극 지도 곳곳에 이름을 남긴 이 탐험가들은 하나같이 같은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얼음으로 막힌 북극해를 뚫고,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최단 항로를 찾는 것.
하지만 당시의 기술로는 불가능했습니다. 북극해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두꺼운 얼음으로 덮여 있었고, 그 얼음을 뚫을 수 있는 배도, 버텨낼 수 있는 장비도 없었습니다.
소련이 처음 뚫었다
북극항로가 처음으로 실질적인 운항 가능성을 보여준 건 20세기 들어서입니다.
소련은 냉전 시기 북극항로를 군사·물류 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국 북극 연안의 자원과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쇄빙선을 건조하고, 시베리아 북부 항구들을 개발했습니다.
1987년, 북극항로의 물동량은 658만 톤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소련의 내부 수송이었습니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국제 화물 항로로 쓰인 게 아니었습니다.
소련 붕괴 이후 북극항로는 다시 긴 침묵에 들어갔습니다. 인프라는 낡아갔고, 물동량은 급감했습니다.
기후변화가 판을 바꿨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예상치 못한 변수가 등장했습니다.
지구 온난화입니다.
북극은 지구 평균보다 약 4배, 일부 지역은 최대 7배 빠르게 온난화되고 있습니다. 2024년 북극 해빙 면적은 위성 관측 이래 최저 수준에 근접했다는 보고가 나왔는데, 한반도 몇 배 수준까지 줄어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연중 얼음으로 막혀 있던 바다가 여름과 가을에는 항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열리기 시작한 겁니다.
2017년 8월에는 역사적인 장면이 하나 연출됩니다. 최초로 쇄빙선 지원 없이 북극항로를 횡단한 선박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2018년 8월에는 세계 최초의 컨테이너선 북극항로 시범운항이 이루어졌습니다. 덴마크 머스크사의 내빙 컨테이너선 벤타 머스크호가 부산항을 출발해 북극항로를 통과한 겁니다.
단 한 번의 시범운항이었지만, 업계에 보내는 신호는 명확했습니다. 컨테이너선이 북극을 통과할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
지금 북극항로의 실제 모습
현재 북극항로는 어느 정도로 열려 있을까요.
숫자로 보면 성장세는 분명합니다. 2024년 북극 폴라코드에 진입한 선박의 수는 2013년 대비 30~40%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집계됩니다. 선박들의 누적 운송거리도 같은 기간 두 배 이상 늘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맥락이 있습니다.
지금 북극항로를 통해 오가는 화물의 대부분은 러시아산 석유와 LNG입니다. 러시아 야말 LNG 프로젝트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를 수송하는 게 주력이고,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컨테이너 통과 화물은 아직 비중이 매우 낮습니다.
통과 화물의 구성을 보면 원유와 벌크화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컨테이너 화물 비중은 한 자릿수 초반대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대하는 북극항로, 즉 한국에서 유럽까지 컨테이너를 실어 나르는 상업 항로는 아직 제대로 열리지 않은 겁니다.
왜 아직 어려운가
북극항로가 가진 잠재력은 분명합니다. 부산항에서 네덜란드 로테르담까지 기존 수에즈 운하 경로 대비 북극항로를 이용하면 거리가 30% 이상 단축되고, 항해 기간은 약 7~10일 줄어듭니다. 그만큼 연료비와 물류비도 절감됩니다.
그런데 왜 지금 당장 쓰지 못하는 걸까요.
첫째, 운항 기간이 여전히 제한적입니다.
현재 북극항로를 쇄빙선 없이 항해할 수 있는 기간은 7월에서 11월까지 약 5개월입니다. 나머지 7개월은 얼음 때문에 쇄빙선의 도움이 없으면 통과가 어렵습니다. 연중 내내 화물을 운송해야 하는 정기 컨테이너 항로로 쓰기엔 아직 계절적 제약이 큽니다.
둘째, 러시아를 통과해야 한다는 지정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북극항로의 약 90%는 러시아 연안 해역을 지납니다. 러시아의 운항 허가를 받아야 하고, 도선료를 내야 하며, 러시아 쇄빙선의 에스코트가 필요한 구간도 있습니다. 이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거기에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대러 제재 문제가 얽히면서 한국 선사들이 북극항로를 이용하는 데 정치적 복잡함이 생겼습니다. 미국과 동맹 관계를 유지하면서 러시아 협력도 해야 하는 딜레마입니다.
셋째, 항해 자체가 여전히 위험합니다.
빙하가 줄었다고 해도 북극해는 예측이 어렵습니다. 갑작스러운 이상기후, 파고가 10~20m에 달하는 폭탄 저기압, 고위도에서 GPS와 통신 장비의 정확도 저하, 해도 데이터 부족까지. 사고가 나면 수색·구조 자체가 극도로 어려운 환경입니다. 그래서 보험료가 일반 항로보다 훨씬 높습니다.
넷째, 인프라가 아직 부족합니다.
러시아는 2035년까지 북극항로 개발에 24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전비 부담과 서방 기업 철수로 일정이 크게 지연되고 있습니다. 항만, 구조시설, 기상관측 인프라 모두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한국 정부가 움직이는 이유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 한국 정부가 북극항로에 속도를 내는 걸까요.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지금 글로벌 해운 환경을 봐야 합니다.
2024년 초 후티 반군이 홍해를 공격하면서 글로벌 해운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던 선박들이 대거 희망봉 우회로 돌아가면서 운임이 폭등하고 물류 일정이 뒤틀렸습니다.
이게 업계에 준 메시지는 하나였습니다. “수에즈 운하 하나에만 의존하는 구조는 위험하다.”
한국은 세계 5위의 수출 대국이면서 해상운송 의존도가 극도로 높은 나라입니다. 에너지 자원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는데, 그 대부분이 해상으로 들어옵니다. 수에즈가 막히면 한국 경제 전체가 흔들립니다.
북극항로는 그 대안입니다. 지금 당장 완전한 대체재는 아니더라도, 위기 상황에서 숨통을 터줄 수 있는 보완재로서의 가치가 분명합니다.
게다가 기후 모델에 따르면 북극항로가 여름철 거의 해빙 없는 상태로 열리는 시점이 2050년에서 2030년대로 앞당겨지고 있습니다.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자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도 작동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가 하고 있는 것들
한국 정부는 지금 구체적인 움직임을 시작했습니다.
해양수산부와 한국해양진흥공사, 한국해운협회는 북극항로 시범운항 참여 선사 공개모집에 나섰습니다. 3,000TEU급 컨테이너선을 투입해 부산항을 출발, 북극해를 거쳐 로테르담까지 화물을 운송하는 방식입니다.
시범운항 참여 선사에는 총 40억 원 규모의 지원이 제공됩니다. 운항 지원금, 화물 유치 장려금, 내빙선 확보 시 금융 지원, 항만시설 사용료 면제 등이 포함되고, 화주에게도 TEU당 10만 원의 보조금이 지급됩니다.
정부의 목표는 이 시범운항으로 실제 항해 데이터와 운항 경험을 축적하고, 2030년 상업 운항을 위한 기초를 다지는 것입니다.
한국해운협회도 민간 차원에서 움직였습니다. ‘북극항로 개척 민간위원회’를 발족하고 50억 원 규모의 기금을 조성하기로 했습니다. 이 기금으로 쇄빙선·내빙선 도입 연구, 극지 전문 인력 양성, 거점 항만 인프라 구축 방향 연구 등을 지원할 계획입니다.
조선업이 받는 기회
북극항로 개발이 본격화되면 가장 직접적인 수혜를 받는 건 조선업입니다.
북극해를 항해하려면 일반 선박으로는 안 됩니다. 얼음을 깨며 나아가는 쇄빙선, 얼음을 버틸 수 있는 내빙선 같은 특수 선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시장에서 한국 조선사들이 이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HD현대중공업은 최근 스웨덴 해사청과 5,000억 원대 규모의 쇄빙전용선 건조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핀란드, 노르웨이 같은 전통적인 쇄빙선 강국들을 제치고 수주한 겁니다. 이번 선박은 PC4 등급으로, 두께 1~1.2m의 해빙을 연속으로 깨며 항로를 개척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전기 추진 체계를 적용한 점도 주목할 부분입니다. 단순히 배를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친환경 극지 운항 기술까지 갖췄다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글로벌 수요도 빠르게 커지고 있습니다. 미국, 캐나다, 핀란드는 ‘ICE Pact’를 구성하고 향후 10년간 70~90척의 쇄빙선을 확보한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 북극이 군사·경제적으로 얼마나 중요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숫자입니다.
중국은 이미 판을 깔고 있다
한국이 시범운항을 준비하는 동안, 중국은 이미 상당히 앞서 나가고 있습니다.
중국 국영선사 COSCO는 2013년부터 수십 차례에 걸쳐 북극항로 화물 운송 경험을 쌓았습니다. 중국 해운사 New New Shipping Line은 내빙 선박을 보유하고 2023년 하반기에만 여러 차례 북극항로 횡단을 완료했습니다.
2024년에는 역대 가장 큰 규모의 중국 컨테이너선이 북극항로를 통과했습니다. 중국은 ‘빙상 실크로드’라는 이름으로 북극항로 개발을 일대일로 전략의 연장선에 놓고, 러시아와의 협력을 통해 빠르게 입지를 굳히고 있습니다.
한국이 시범운항을 논의하는 수준이라면, 중국은 이미 정기 서비스를 향한 구체적인 발판을 놓고 있는 셈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솔직하게 말하면, 북극항로의 미래는 아직 불확실한 부분이 많습니다.
낙관적인 시나리오를 보면, 기후 모델에 따라 2030년대 중반이면 여름철 북극해가 거의 얼음 없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쇄빙선 없이도 상당 기간 운항이 가능해지고, 비용 구조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러시아가 2035년까지 240억 달러를 투자해 인프라를 개선하고, 원자력 쇄빙선을 추가로 건조하면 운항 편의성도 높아집니다. 한국으로서는 부산항이 동북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핵심 환적 허브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봤을 때 넘어야 할 산도 많습니다.
러시아와의 협력 문제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하면 한국이 러시아 협력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조심스럽습니다. 기술적으로도 북극해 해도 데이터, 기상 예측 시스템, 선원 훈련 체계 등이 아직 충분히 갖춰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남는 질문
북극항로는 지금 이 시점에서 “곧 열릴 새 항로”라기보다는, “조심스럽게 준비해야 할 중장기 전략”에 더 가깝습니다.
당장 내년부터 컨테이너선이 부산을 떠나 북극을 통해 로테르담으로 가는 시대가 오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10년, 20년의 시간 축에서 보면 이 항로가 글로벌 물류 지형을 바꿀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한국이 먼저 시범운항으로 데이터를 축적하고, 조선업이 특수선 기술로 글로벌 시장에서 입지를 굳히고, 부산항이 극지 물류 허브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 지금 막 시작된 겁니다.
500년 된 꿈이 현실이 되는 속도가 생각보다 빨라지고 있습니다. 그 자리를 누가 먼저 차지하느냐가, 앞으로 수십 년간의 해운 패권을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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