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반도체의 반격, 한국에 위기일까 기회일까

한때 세계 1위였던 일본 반도체, 조용히 부활하고 있다

1980년대 일본 반도체 기업들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이 얼마였는지 아세요?

거의 50%였어요. 세계에서 팔리는 반도체 두 개 중 하나가 일본 제품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근데 지금은요? 메모리는 한국이 장악했고, 파운드리는 대만 TSMC가 압도적이에요. 일본 반도체 하면 솔직히 잘 떠오르지 않죠.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일본이 조용히, 하지만 꽤 진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반도체를 국가 전략 산업으로 다시 올려놓고 대규모 투자를 시작한 거예요. 왜 갑자기 이런 움직임이 나오는 건지, 그리고 이게 한국에는 어떤 의미인지를 풀어볼게요.


일본 반도체는 어쩌다 뒤처졌나

1980년대 일본 반도체가 전성기를 누릴 때, 미국은 위기감을 느꼈어요. 자국 반도체 기업들이 일본에 밀리기 시작했거든요.

미국의 대응은 강력했습니다.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을 체결해서 일본 반도체의 미국 시장 진출을 제한하고, 일본 시장을 외국 기업에 강제로 개방했어요. 동시에 미국은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와 장비 기술에 집중 투자하면서 일본이 따라오기 어려운 영역을 선점하기 시작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990년대 일본 경제 버블이 꺼지면서 기업들의 대규모 투자 여력이 사라졌어요. 반도체 산업은 끊임없는 설비 투자가 필요한 분야인데, 투자가 멈추면 바로 뒤처집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불황기에 오히려 공격적으로 투자하면서 메모리 시장을 장악한 것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거죠.

그렇게 일본 반도체는 30년 동안 조용해졌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다시 움직이나

지정학이 판을 바꿨습니다.

미·중 기술 전쟁이 격화되면서 반도체가 단순한 산업 제품이 아니라 국가 안보 자산이 됐어요. 미국이 중국에 첨단 반도체 수출을 막기 시작했고, TSMC가 있는 대만을 둘러싼 지정학적 긴장도 높아졌습니다. 만약 대만 해협에서 문제가 생기면 전 세계 첨단 반도체 공급이 한순간에 끊길 수 있다는 공포감이 퍼졌어요.

일본 입장에서는 더 직접적인 이유도 있었어요. 2021년 자동차용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 때 일본 자동차 공장들이 줄줄이 가동을 멈췄어요. 반도체를 외국에서 사 오는 구조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뼈저리게 느낀 거죠.

일본 정부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 건 이 시점부터예요.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을 만들고, 반도체를 국가 전략 산업으로 지정하고, 천문학적인 보조금을 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이 여전히 강한 곳이 있다

일본 반도체가 뒤처졌다고 했는데, 사실 완전히 밀려난 건 아니에요. 눈에 잘 안 보이는 곳에서 여전히 핵심을 쥐고 있어요.

반도체 소재가 대표적입니다.

포토레지스트라는 소재 아시나요? 반도체 회로를 새기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쓰이는 화학 소재인데, 전 세계 시장의 90% 가까이를 일본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어요. JSR, 신에쓰화학, 도쿄오카공업 같은 기업들이 수십 년간 기술을 쌓아온 결과입니다.

실리콘 웨이퍼도 마찬가지예요. 반도체가 만들어지는 얇은 원판인데, 신에쓰반도체와 SUMCO 두 일본 기업이 전 세계 시장의 절반 이상을 공급합니다. 삼성전자도, TSMC도 이 웨이퍼를 일본에서 사 오는 구조예요.

제조 장비도 있어요. 도쿄일렉트론(TEL)은 세정 장비와 증착 장비 분야에서 세계 3위 반도체 장비 기업이에요. 실제로 반도체 장비 시장에서 일본 기업들 전체를 합치면 점유율이 30%를 넘습니다.

2019년 일본이 한국에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를 걸었을 때 한국이 그렇게 긴장했던 이유가 여기 있어요. 반도체를 만들려면 일본 소재가 없으면 안 되는 구조거든요.


라피더스, 일본의 가장 큰 도박

그런데 일본의 야망은 소재와 장비에서 끝나지 않아요. 직접 최첨단 반도체를 만들겠다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라피더스(Rapidus)입니다.

2022년 말에 출범한 회사인데, 토요타, 소니, 소프트뱅크, 키옥시아 같은 일본 대기업 8개가 출자하고 일본 정부가 수조 엔 규모의 보조금을 지원하는 국가 프로젝트예요.

목표가 놀라워요. 2나노 반도체를 2027년까지 양산하겠다는 겁니다.

2나노가 얼마나 최첨단이냐면, 지금 삼성전자와 TSMC도 3나노 공정을 막 시작한 단계예요. 일본이 오랫동안 첨단 반도체 생산에서 손을 놓고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이건 엄청난 도약을 목표로 하는 거예요.

파트너도 화려해요. 세계 최고 반도체 연구기관으로 꼽히는 미국 IBM의 반도체 연구소와 기술 협력을 맺었고, 벨기에의 반도체 연구기관 IMEC와도 손을 잡았습니다.


근데 이게 현실이 될 수 있을까

솔직하게 봐야 해요.

라피더스 앞에 놓인 장벽이 만만치 않습니다.

돈 문제가 첫 번째예요. TSMC가 최첨단 공장 하나 짓는 데 20조 원 이상을 쏟아붓습니다. 라피더스가 확보한 자금은 아직 이 수준에 훨씬 못 미쳐요. 일본 정부가 지원을 늘리겠다고 하지만, 얼마나 지속될지는 미지수입니다.

기술 공백이 두 번째예요. 30년 가까이 최첨단 공정에서 손을 뗐다는 건 그만큼 경험이 쌓이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2나노 공정을 개발하는 것과 그걸 안정적으로 대량 생산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TSMC조차 새 공정을 양산 단계까지 끌어올리는 데 수년이 걸려요.

인력 문제가 세 번째예요. 최첨단 반도체 공정을 다룰 수 있는 엔지니어는 전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자원이에요. 일본은 이공계 인재 부족 문제를 오래 안고 있어서, 필요한 인력을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큰 과제입니다.

고객 확보가 네 번째예요. 공장을 지어도 거기서 만든 반도체를 사 줄 고객이 있어야 사업이 됩니다. 애플, 엔비디아, 퀄컴 같은 대형 고객들은 이미 TSMC와 삼성에 단단히 묶여 있어요. 새로운 공급자로 갈아타게 만들려면 압도적인 가격이나 기술 우위가 필요한데, 그게 쉽지 않죠.


일본의 취약한 곳도 있다

소재와 장비에서 강한 일본이지만, 공급망 전체를 자국 중심으로 만들기엔 아직 구멍이 있어요.

실리콘카바이드나 형석 같은 일부 핵심 원료는 중국 의존도가 상당히 높아요. 미·중 갈등이 격화되면 중국이 이 원료 수출을 제한할 가능성이 있는데, 그게 일본 반도체 산업에도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중국이 실제로 2023년 갈륨과 게르마늄 수출 규제를 선언했을 때, 일본도 영향을 받았어요. 공급망의 취약한 고리는 어느 나라도 피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한국 입장에서 일본의 부활을 어떻게 봐야 하나

한국과 일본의 반도체 관계는 단순하지 않아요. 경쟁자이면서 동시에 서로 없으면 안 되는 파트너거든요.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일본 소재와 장비를 상당히 많이 씁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공장에 들어가는 포토레지스트, 실리콘 웨이퍼, 각종 공정 장비의 상당 부분이 일본산이에요. 이 구조는 2019년 일본 수출 규제 사태 이후 한국이 소재 국산화를 추진하면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지만, 여전히 높은 의존도가 남아 있어요.

반대로 일본 소재 기업들 입장에서 한국은 가장 중요한 고객이에요. 실제로 일부 일본 반도체 소재 기업들이 삼성·SK와 더 가깝게 있으려고 한국에 직접 생산 거점을 세우는 경우도 늘고 있습니다.

라피더스가 만약 성공해서 2나노 양산 체제를 갖추게 되면, 첨단 파운드리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경쟁하는 구도가 생길 수 있어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경쟁보다는 각자의 강점에서 역할을 분담하는 방향이 더 유력해 보입니다. 일본은 소재·장비, 한국은 메모리, 대만은 첨단 파운드리라는 구도가 당분간은 유지될 가능성이 높거든요.


조용한 부활이 성공할 수 있을까

일본 반도체의 재도약 시도는 분명히 의미 있는 움직임이에요.

소재와 장비에서는 이미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을 쥐고 있고, 라피더스를 통해 첨단 생산 능력 회복까지 노리고 있습니다. 정부의 강력한 지원 의지도 있고, TSMC가 일본 구마모토에 공장을 세우는 것도 일본 반도체 생태계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어요.

다만 라피더스의 2나노 양산 목표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기술도, 돈도, 인력도, 고객도. 어느 하나 쉬운 게 없어요.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30년 동안 조용했던 일본 반도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움직임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지형을 조금씩 바꾸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변화는 한국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반도체 전쟁의 지도가 다시 그려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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