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반도체의 조용한 부활
지금 일본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까
한때 일본은 세계 반도체 산업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1980년대만 해도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일본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빠르게 달라졌습니다. 메모리 반도체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성장했고, 파운드리 시장에서는 대만 기업들이 압도적인 존재로 떠올랐습니다.
이 흐름 속에서 일본 반도체 산업은 한동안 존재감이 크게 줄어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일본 정부의 움직임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반도체 산업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재정의하며 공급망 재편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도체는 이제 안보 산업이다
이 변화의 배경에는 지정학적 긴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중국을 대상으로 반도체 수출 규제를 강화하면서 반도체는 단순한 산업 경쟁을 넘어 국가 안보와 직결된 분야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일본 역시 공급망 전략을 재정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을 제정했고, 이어 반도체 디지털 산업 전략과 AI 반도체 산업 기반 강화 프레임을 발표하며 반도체 정책을 연이어 추진하고 있습니다.
핵심 방향은 명확합니다.
반도체 공급망을 일본 중심으로 다시 강화하겠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여전히 강한 영역
반도체 산업을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은 메모리와 파운드리 경쟁을 먼저 떠올립니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은 훨씬 더 넓은 생태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태계의 여러 단계에서 일본 기업들은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분야가 반도체 제조 장비와 소재 산업입니다.
세정 장비나 열처리 장비 같은 공정 장비 시장에서 일본 기업들은 여전히 강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 포토레지스트, 실리콘 웨이퍼 같은 핵심 소재 역시 일본 기업들이 상당한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는 영역입니다.
결국 일본은 반도체 산업에서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핵심 공급망을 상당 부분 담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이 다시 칩을 만들려는 이유
그렇다면 일본 정부의 목표는 어디까지일까요.
단순히 장비와 소재 분야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일본은 이제 첨단 반도체 제조 자체를 다시 시작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전략의 중심에는
Rapidus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라피더스는 일본 정부와 여러 기업들이 함께 추진하고 있는 차세대 반도체 프로젝트로, 목표는 일본에서 다시 첨단 반도체 생산 능력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특히 일본은 미래 반도체 경쟁의 기준으로 여겨지는 2나노 공정 개발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넘어야 할 현실적인 장벽
다만 이 도전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첨단 반도체 산업은 막대한 자본과 오랜 기술 축적이 필요한 분야입니다. 실제로 세계 주요 반도체 기업들은 공장 하나를 짓는 데도 수십조 원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라피더스 역시 비슷한 현실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첨단 공정을 안정적으로 양산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고, 공정 기술을 실제 생산 단계까지 끌어올리는 과정도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 사업을 지속하려면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과 경쟁하면서도 실제 고객을 확보해야 하는 문제가 뒤따릅니다. 반도체 산업에서는 기술뿐 아니라 시장이 함께 형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변수는 인력입니다. 첨단 공정을 개발하고 운영할 수 있는 숙련된 엔지니어를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는지도 프로젝트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소로 꼽힙니다.
결국 일본의 반도체 부활 전략은 라피더스 프로젝트가 이 여러 과제를 얼마나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 공급망의 또 다른 약점
일본 반도체 산업 역시 완전히 자립적인 공급망을 갖춘 것은 아닙니다.
일부 핵심 원료에서는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구조가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실리콘카바이드나 형석 같은 소재는 중국 의존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며, 일부 화학 원료 역시 특정 국가에서 대부분을 수입하고 있습니다.
즉 일본 역시 반도체 공급망을 완전히 자국 중심으로 구축하기에는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미묘한 관계
이러한 구조 속에서 한국과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경쟁과 협력이 동시에 존재하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일본의 소재와 장비를 상당 부분 사용하고 있으며, 일본 기업들 역시 한국을 중요한 시장으로 보고 있습니다.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 이후에도 양국 반도체 공급망이 크게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이런 상호 의존 구조 때문입니다.
한국으로 들어오는 일본 기업들
최근에는 일본 반도체 소재 기업들이 한국에 생산 거점을 확대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본 내에는 주요 고객이 많지 않은 화학 기업들이 한국 반도체 산업과 가까운 지역에 공장을 세우면서 협력 관계를 강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에 진출한 일본 반도체 기업들의 경우 매출과 고용이 꾸준히 증가하는 흐름도 확인되고 있습니다.
반도체 경쟁의 다음 장
반도체 산업은 단순한 기술 산업이 아닙니다.
이 산업은 경제와 산업 구조뿐 아니라 국가 안보와도 연결된 전략 산업입니다.
그리고 지금 일본은 이 분야에서 다시 한 번 존재감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직 그 결과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반도체를 둘러싼 글로벌 경쟁은 지금도 새로운 국면으로 계속 이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